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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per liber : 풍요로운 인생

by 긍정왕수전노 2019.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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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10일 생 긍정왕수전노
그리 풍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어렸을때부터 부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나로서는 알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병적으로 더 나은 삶을 동경하는 습성을 지니고 살아온게 33년이다.

이런 습성이 나를 발전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장 심한 부자동경병을 앓았던 것은 중2때였는데 그 시작은 이랬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알게된 같은반 친구 P군은 복도식 24평 아파트에 살던 나보다 훨씬 넓은 32평 계단식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나는 남들에 비해 훨씬 어렸을때부터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깨닫고 있었다..)
페인트대리점을 하시던 대졸 출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온 그는 확실히 우리집보다는 풍족하고 뭔가 있어 보였다.

1990년대 후반, 파인애플이라는 과일은 통조림으로만 접했던 나에게 어느날 그 친구집에서 노는 중 퇴근하고 돌아오신 친구 부모님의 손에 들려있던 "까르푸"에서 사온 리얼 파인애플 슬라이스는 참 인상적이었다.
한입 얻어먹고 싶었는데 집에 갈시간이 되어 입맛만 다시다 나왔었다.

그런 P군 집안에 대한 동경은 사춘기와 짬뽕되어 격화되었고 사건은 중2때 드디어 터지고야 말았다.
당시 미니카에 무척 매진했던 내가 성장함에 따라 한단계 위 취미생활로 간주 되는 "RC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P군과 같이 RC카에 대한 의견을 나누던 중 P군이 부모님께 돈을 받아 "진짜RC카"를 사러 같이 프라모델샵에 들렀었다.

보통사람들은 무선모형자동차면 다 같은 RC카인줄 아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이마트 롯데마트에서 파는 완제품의 RC카는 가짜다.
모름지기 진짜 RC카는 직접 조립해야 하며 타미야, 아카데미, 교쇼 이런데서 만든 제품이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RC카다.
문제는 진짜 RC카는 가격이 마트표 RC카보다 훨씬 비싸다는 점이다.

당시 가격으로 15만원은 줘야 살 수 있었는데 P군이 그걸 사버린 거다.
같이 조립하고 친구한테 부탁해서 조금 조종해보긴 했지만 내것이 아니니 더더욱 RC카에 대한 목마름이 커졌다.

그러다 급기야는 2차성징이 시작되어 거뭇거뭇 수염이 돋아 나기 시작하는 다큰놈이 부모님 앞에서 갑자기 펑펑 울면서 RC카가 너무 갖고 싶은데 비싸서 살수가 없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사달라고 하기 죄송스러운데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횡설수설하며 대성통곡을 한 것이다.
부모님은 마치 준비하셨다는 듯 봉투를 내미셨고 난 진짜 RC카를 갖게 되었다.

지나온 내 삶을 돌아보면 거의 이랬던 것 같다. 내가 처한 현실이 언제나 못마땅했고 더 나은 내일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애써 마주한 현실을 외면하려 했다.
중2 RC카 사태때도 사실 나한텐 그래도 가짜RC카긴 하지만 마트에서 파는거 치곤 비싼 RC카가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더 나은 뭔가를 알게 된 이상 내가 가진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3년, 군대 2년을 반강제로 감금당하면서 더 좋은 "물건", "여행이나 어학연수 같은 경험"으로 부터는 어느정도 격리되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부자로 사는 미래"로 가득차버렸다.
그냥 인생의 0순위 목표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감금으로 부터 풀려나서도 내 스스로를 "부자로 가는 길"에 장애물이 되는 것들은 멀찌감치 치워버리게 되었다.
또래와는 확실히 다른 삶이 시작된 것이다.
옷? 시계? 지값? 그런건 다 필요 없다.
어학연수? 유럽여행? 그런 건 나중에 부자가 되서나 가야지 지금은 사치
석사 박사? 대학원학비는 어떻게 할거며 돈벌어야되는데 무슨 소리야 ㅡㅡ
그저 내 통장에 얼마나 많은 숫자가 찍히느냐가 중요한 거지 내 삶 전반의 균형은 개나줘버려였다.

삶의 균형은 내가 부자가 된 다음 찾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쨋든 그렇게 30년 넘게 살다보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단계에 올라온 것같다.

그런데 얻는게 있으면 잃는게 있는게 당연한 이치라는 듯 내 삶, 내 인생을 살펴보니 다소 무미건조해보인다.
누가 그러던데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과 유럽 선진국의 중산층 기준은 다르다.

우리나라는 재산을 충분히 가진 사람이 중산층인 반면 유럽은 정의구현, 취미생활, 인적관계를 충분히 가진 사람이 중산층이라고....

난 솔직히 유럽기준으로 하면 중산층은 커녕 차상위계층일듯...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게되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와이프는 식성이나 생활습관은 나랑 비슷하지만 인생관은 나랑 상당히 다르다.
그녀는 "Semper liber"를 인생좌우명으로 하는듯한데 라틴어로 "언제나 자유롭게"라는 의미라 한다.

그녀는 비록 경제적 부를 쌓는데는 큰 소질은 없는듯하나 PT를 받으며 운동에 매진한다던지 크레마를 사서 다닐 정도로 책 읽는데 관심을 둔다든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덕질은 한다던지 정말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 편인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경제적 여유로움과는 별개로 행복해 보인다.

와이프를 만나고 나서 경제적 관념때문에 힘든 시간도 많이 겪었지만 "풍요로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인생이란 이러거나 저러거나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게 최우선이다.
이놈의 행복은 돈만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사람 욕심이 참 끝도 없어서 하나 가지면 둘 갖고 싶고, 남의 떡이 늘 커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돈 말고 개인적인 성취, 몰두할 수 있는 취미를 갖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육체적 강건함, 명상 등 삶 자체를 풍요롭게 하는 요소를 더 많이 찾아내고 갖춰나가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너무 늦기전에 진짜 "풍요로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 다행이다.
결혼 안하고 혼자서 쭉 살았다면 이런 생각 절대 못했을 것 같다.
아 물론 통장잔고는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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